이어 세자시강원사서로서 서명선(徐命善)·정민시(鄭民始) 등과 함께 세손(뒤의 정조)을 보호하는 데 힘써 세손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776년 노론 청명당(淸名黨) 계열의 김종수(金鍾秀) 등과 연계하여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정후겸(鄭厚謙)·홍인한(洪麟漢)·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처형시켰다.
그해 정조가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숙위대장을 겸임했고 곧 도승지에 올라 정책 결정을 통제했으며, 금위대장·훈련대장 등을 거쳐
오영도총숙위(五營都摠宿衛)가 되어 군사권을 장악했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모든 소계(疏啓)·장첩(狀牒)·차제(差除)를 총람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둘러 백관을 맹종하게 함으로써
최초의 세도정권을 이루었다.
그러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하여 핍박함으로써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고 세자로 책봉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다가 1779년 9월 정조의 은퇴 권유로 조정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80년 왕후 독살기도에 연루되었다 하여 정민시·서명선·유언호(兪彦鎬)·김종수 등의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江陵)으로
추방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인 송덕상(宋德相), 민우수(閔遇洙)의 문인 김종후(金鍾厚) 등의 지원을 받아 노론 청류(淸流)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으나, 전횡을 일삼고 나아가 스스로 외척이 되어 독주함으로써 여타 외척세력 및 노론·소론·남인 모두와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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