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성대군과 밀양박씨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라 박혁거세의 29세손인 경명왕의 8대군 중 밀성대군 박언침이 중시조다.
단일 본관으로 김해김씨 다음으로 두 번째 많은 성씨다. 조선조에서는 문과 급제자만 2백61명을 배출했다.
밀성은 밀양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밀양을 본관으로 삼았다.
밀양박씨는 8세손 언부(문하시중공파), 8세손 언상(도평의사공파), 8세손 언인(좌복야공파),
8세손 언양(밀직부사공파), 8세손 천익(판도공파), 8세손 을재(좌윤공파) 등 크게 6파로 나누어진다.
그 뒤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고, 10세손 환(桓)이 영암박씨로 분적하는 등
10여개 본관으로 갈라졌다.
종파인 8세손 언부는 문하시중과 도평의사를 거쳐 밀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에서 은산군 영균
(永均)을 비롯한 13개 파가 형성되었다.
밀성부원군 언부의 차남 의신(義臣)의 후손에서는 맏아들 원(元)의 계통과 밀성군에 봉해졌던 척(陟)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원(元)의 8세손 의중(宜中)은 고려우왕때 대사성과 밀직제학을 거쳐 뒤에 공신에 올랐다.
문종 때 경흥부사 거겸(居兼)은 의중의 손자다.
고려 공민왕 때 사헌부규정을 역임했던 현(鉉)은 평장사 효신(孝臣)의 8세손이다.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에
등용되어 수원부사를 거쳐 안변부사를 역임했다. 특히 그는 성리학 학자로 명망이 높았고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다. 후손들 중에서 자손이 가장 번성한 파가 바로 박현의 ▲규정공파다.
현(鉉)의 손자 사경(思敬)은 고려조에서 전법판서 겸 상장군을 지내고 추성익위공신에 책록되었다.
그의 아들 침은 공민왕 때 전의판사를 역임하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개성 두문동(杜門洞)으
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박위는 고려 말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다. 경상도 도순문사로 있을 때는 대마도에서 적선 3백여 척을 부수는
등 공을 세웠다.
조선 정종의 부마로 지돈령부사에 오른 갱의 7세손 정원(鼎元)은 평안도사를 역임했다. 그의 종손 신규(信圭)
는 호조판서를 지낸 후 청백리에 녹선되어 글씨로 이름을 떨쳤다.
강생(剛生)의 손자로 세조 때 응천군에 봉해진 중손(仲孫)은 공조를 비롯한 4조의 판서를 거쳐 밀산군에 개봉
되었다. 그의 맏아들 남은 부사를 지냈고, 차남 미(楣)는 대사간과 예조참의를 거쳐 여지승람을 편찬했다. 막내 건(楗)은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으로 5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찬성공 신생(信生)의 현손 영(英)은 양녕대군의 외손자로 주역, 천문, 지리, 의술 등에 능통했다. 무예에도 뛰어나 용맹을 떨쳤다.
밀성군 광영의 손자인 낙촌공 충원(忠元)은 명종 때 단종의 원령으로 잇따라 7명이 죽어가는 영월군수를 자청하여 부임했다. 그 뒤 중종실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선조 때 우찬성, 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은 세도가인 윤원형이 사위를 삼고자 청하는데 면전에서 거절한 계현(啓賢)이다. 계현의 손자가 영의정에 오른 승종(承宗)이다.
밀양박씨의 후손 중에서 조선 전기의 인물로는 박연이 유명하다. 그는 고구려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음악가)으로 꼽힌다.
박연은 어려서부터 항상 가슴에 손을 대어 박자 맞추는 모양을 하고 휘파람을 불어 곡조를 연습했다. 태종 5년 문과에 급제하고 세종이 즉위한 뒤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했다. 당시 조율이 불완전한 악기의 정리와 악보찬집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편경 12장을 제작하는 등 미비한 궁전 음악을 크게 고쳤다.
1445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중추원부사 등을 거쳐 예문관대학제학에 오른다. 세조 때 그의 셋째 아들 박수우가 안평대군과 가깝다는 이유로 처형되면서 가문이 멸족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3명의 왕을 거치면서 기여한 그의 공이 참작돼 화를 면한다. 대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충북 영동으로 돌아가 피리소리에 묻혀 여생을 보낸다. 어려서부터 피리의 신동으로 불리던 그는 당시 8순 고령인데도 청아하고 애절한 가락을 한마당 연주하고 이별을 고한다.
조선조 후기의 인물이며 북학파의 일원으로 유명한 박제가도 밀양박씨의 인물이다. 박지원의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했으며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시문 4대가의 한 사람이다. 1778년(정조2년) 사은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청나라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귀국 후 실사구시의 사상을 토대로 “북학의”를 저술한다. 다음해 정조의 특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많은 서적을 편찬했다. 그는 생활기구의 개선, 농기구 및 농사의 개량, 부패한 과거제도의 쇄신, 산업의 장려, 상공업 및 해외무역 장려 등 정치, 경제, 사회제도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박제가는 정조가 죽고 신유사옥 때 개혁파의 한 사람으로 유배당한다. 2년 후 유배에서 풀렸으나 은거하는 바람에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 경북 군위군 우보면 모산동, 경기도 개풍군 상도면 상도리,
경북 청도군 금천면 신지동, 이서면 일원 경기도 옹진군 용연면 오산리, 경북 문경군 가은읍 수예리,
전남 진도군 의신면 칠전리,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집성촌이다.
2000년 현재 3,031,478명이 있다. 주요파는
▲문하시중공파 ▲도평의사공파 ▲좌복사공파 ▲밀직부사공파 ▲판도공파 ▲좌윤공파 ▲사문진사공파
▲충헌공파 ▲영동정공파 ▲밀직부원군파 ▲정국공파 ▲규정공파 등이다. |